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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휴대전화 이야기] 영화 ‘강철비’처럼 남북한 통화 가능할까

2018.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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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과 북한에서 서로 통화를 하는 일이 가능할까요?

“선배, 남한에서 북한에 전화 거는 일이 가능한가요?”

최근 영화 ‘강철비’를 본 후배 기자가 물었다. 통신업계 출입 기자인 후배한테는 강철비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최정예요원(정우성)이 북한 측에 연락하는 장면이 유독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영화 강철비는 북한에서 쿠데타 발생 직후 정우성이 치명상을 입은 ‘북한 1호’와 함께 개성공단을 통해 남한으로 내려온 내용을 다룬다. 정우성은 남한에 와서 민간인의 휴대전화를 빌려 북한 장성에게 전화를 건다. 후배 기자는 가상이 아닌 실제 상황에서도 남한에서 북한에 휴대전화를 거는 것이 가능한지 궁금해했다.

후배의 질문에 답부터 하면, 지역에 제한이 있지만 가능한 일이다. 위성 통신이나 군 전용망 등을 이용하지 않고 민간인도 가능하다. 북한의 공식 이통통신서비스망은 이용할 수 없지만, 북한 당국이 인정하지 않는 비공식 통신망을 이용하면 남한에서 북한으로 휴대전화로 통화할 수 있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6년 말 기준 북한 휴대전화 가입자 수는 361만명이다. 남한의 가입자 수 6130만명의 17분의 1수준이다. 인구 100명당 휴대전화 가입자 수로 환산하면, 북한은 인구 100명당 14.26명, 남한은 인구 100명당 122.65명이 이동통신 서비스에 가입돼 있다. 북한 인구의 85%는 휴대전화를 쓰지 않고 남한에선 1명이 2~3대 휴대전화를 쓰는 경우도 많다는 뜻이다.

통계청이 언급한 숫자는 북한 당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휴대전화 사용자 수다. 하지만, 북한에는 당국이 인정하지 않는 비공식 휴대전화를 쓰는 사람도 꽤 많다. 북한 휴대전화 서비스를 10년 이상 관심 있게 지켜본 필자 입장에서는 북한의 휴대전화 가입자 수 못지않게 북한 휴대전화 서비스의 독특한 특성, 즉 이중 휴대전화 네트워크라는 점을 살펴보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평창 동계 올림픽을 계기로 북한 사회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도 관심을 모은 북한 휴대전화 서비스에 대해 3회에 걸쳐 알아본다.

내가 만난 북한 출신 과학자

7년 전 만난 북한 출신 여성 과학자 A 씨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

“애니콜(한국전화)을 북한에 들여보내면 휴대전화 요금은 여기(남한)에서 뭅니다(냅니다). 중국 무역상들이 자기 장사를 하기 위해 중국 휴대전화를 들여보내면 중국에서 요금을 냅니다. ‘양말 몇 자루 나갔느냐’ 등등 자기 필요에 의해서 들여보낸 것입니다.

한번은 중국에 있는 동생이 (북한) 화교의 휴대전화를 이용해 우리 아들에게 전화를 이틀 동안 걸어왔습니다. 나한테 전화한다는 것을 아들에게 전화를 했고 아들은 중국 전화번호가 찍히니까 안 받았습니다. 요즘 중국에서 걸려오는 이상한 전화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같은 전화번호가 자주 와서 받으니 동생이었고 둘이 왕왕 울었습니다. 한국 돈으로 460만원을 북한에 부쳤습니다. 여기서 북한에 있는 동생 2명을 먹여 살려야 합니다. 동생 2명한테 딸린 식구까지 합하면 먹여 살려야 하는 사람이 여덟이나 됩니다.”

A씨와의 인터뷰에서 2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한국에서 개통한 휴대전화나 중국에서 개통한 휴대폰을 북한으로 보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남한에 있는 북한 이탈 주민들은 북한에 있는 가족과 친척한테 휴대전화로 자주 통화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 중국의 이동통신서비스망과 기지국 신호를 활용할 수 있는 북한의 조중 접경 지역

비밀은 북한과 중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조중 접경 지역에 있다. 조중 접경 지역의 중국 땅에는 이동통신서비스망과 기지국이 촘촘히 들어서 있다. 중국과 인접한 북한 지역에서는 중국 이동통신사의 기지국 신호가 잡히기 때문에 중국에서 개통한 휴대전화를 그대로 쓸 수 있다. 이 지역에서는 한국에서 개통한 휴대전화도 로밍해서 쓸 수 있다.

필자는 북한 휴대전화의 확산 과정을 북한 당국의 정책 변화로 구분한다. 1990년대부터 2002년까지를 ‘제1기 – 1차 밀수 시대’, 2002년부터 2004년까지를 ‘제2기 – 1차 공식 서비스 시대’, 2004년부터 2008년 말까지를 ‘제3기 – 2차 밀수 시대’, 2008년 말부터 현재까지를 ‘제4기 – 2차 공식 서비스 시대’로 구분한다.

제1기에는 북한 당국이 휴대전화 도입과 관련해 특별한 정책이 없었다. 제2기에는 휴대전화 서비스를 개시했으나 뜻밖의 사고로 전격 중단됐다. 제3기에는 공식 휴대전화 서비스가 없는 상황에서 중국과 북한 접경 지역을 중심으로 밀수 휴대전화가 확산됐다. 제4기에는 북한 당국이 북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외국인 직접 투자를 통해 대대적으로 이동통신 서비스에 나선다.

바로 제1기와 제3기에 북한 당국이 인정하지 않는 비공식 휴대전화 사용자가 크게 늘었다.

우선, 제1기(1990년대~2002년)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필자는 당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2000년대 한국으로 온 북한 함흥 출신 하 모씨(가명)를 만났다. 그는 휴대전화를 일컫는 북한말을 ‘서우지’라고 했다.

오늘날 북한에서 휴대전화를 일컫는 말은 ‘손전화’이다. 서우지는 손전화의 함흥식 사투리일까. 아니다. 중국어로 휴대전화를 ‘手机(手機· 손기계)라고 쓰고 서우지(shǒujī)라고 읽는다. 그가 북한에 거주할 당시에는 휴대전화를 쓰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다만, 중국과 비즈니스하는 북한 사람들 중에는 중국 휴대전화를 쓰는 경우가 드물게 있었다. 북한에서 손전화라는 용어도 널리 쓰이지 않았을 때니, 휴대전화를 보거나 간접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중국 단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1990년대 북한이 ‘고난의 행군’으로 불리는 경기 침체를 맞이하면서 두만강 및 압록강 일대에서는 골동, 철제, 동 등 지하자원과 수산물을 중국으로 보내고 식량, 생필품을 받는 형태의 밀수 무역이 성행하였다. 2000년대 들어서 중국 측 밀수 파트너들이 북한 측 파트너와 소통하기 위하여 중국 이동통신 서비스에 가입된 휴대전화를 제공했다. 이것이 북한에 중국 휴대전화가 유입되는 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청진 출신으로 무역업에 종사했던 북한 이탈주민 최 모씨의 말이다. 그는 청진 3대 거부로 꼽힐 정도로 장사를 크게 하였고 중국과의 왕래도 잦았다고 했다.

“96년, 97년에도 중국 휴대전화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에는 휴대전화를 직접 소유하지 못하고 중국 측 사람들이 가져오면 썼습니다. (중국에) 오래 왔다 갔다 하다 보니, 2001년에는 중국 폰을 (소유하고) 많이 사용했습니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북한 당국이 공식 제공하는 휴대전화 서비스가 있었다. ‘제2기 – 1차 공식 서비스 시대’라고 분류할 수 있는데, 큰 사고로 짧게 끝났다. 이 시기에 대한 설명은 후술하도록 하겠다.

2004년 북한의 공식 휴대전화 서비스가 중단돼 북한과 중국의 접경 지역의 비공식 밀수 휴대전화 사용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북한의 공식 휴대전화 서비스가 중단되고 재개되기 전까지인 2004년부터 2008년 말까지를 ‘제3기- 2차 밀수 시대’로 분류한다.

이 시기 신의주, 혜산 등 국경 도시에 거주하는 상인 대부분은 상거래의 필수품목인 중국 통신사에 가입된 휴대전화를 소유하고 있었다. 북-중 간의 밀수, 보따리 장사, 무역 등 각종 거래가 늘어나면서 국경연선에서 중국 거래선과의 통화수요가 증가했던 것이다. 북한 암시장의 인기품목이었던 중국 휴대전화는 2005년 기준으로 미화 200달러(남한 기준 20∼30만원)에 판매됐다.

이때 중국 통신사업자들이 국경 지역에도 경쟁적으로 휴대전화 기지국을 대거 증설해 통화 품질도 갈수록 좋아졌다. 북한 당과 성에 근무하는 간부들도 중국 휴대전화를 많이 썼다. 북한 간부들도 국가의 배급만으로는 먹고 살기 힘들기 때문에 대부분 대방으로 불리는 무역상과 일종의 공생 관계를 맺고 있었다. 북한 간부들은 무역상의 편의를 봐주고 금전이나 필요한 물건들을 얻었다.

북한의 비공식 휴대전화망은 2008년 북한의 공식 휴대전화 서비스가 재개된 이후에도 계속 발달하고 있다. 북한 당국은 비공식 휴대전화망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체제를 위협할 수 있다고 보고 비공식 휴대전화망 이용자를 퇴치하는 노력도 상당히 기울이고 있다.

비공식 휴대전화망이 북한 주민, 북한 화교, 탈북자, 남한 대북 단체, 탈북자의 가족, 조선족, 조교, 외화벌이 일군 등 다양한 종류의 행위자가 쓰는 북한 이탈 네트워크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북한의 비공식 휴대전화를 이용하는 이해관계자는 10만 명을 웃돌 것으로 추산된다. 탈북자 2만 명과 그들의 가족과 지인을 산술적으로 계산해도 수만 명이며 조선족, 대북 관련 단체들을 포함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난다.

북한의 공식 휴대전화 서비스  

▲ 북한의 휴대전화 가입 현황

다음으로 제2기(2002~ 2004년) 상황을 살펴보자.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북한은 공식 휴대전화 서비스에 나선다. 2001년 1월 중국 상하이를 방문하고 돌아온 김정일 당시 노동당 총비서는 중국 발전상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김일성 탄생 90주년인 2002년 4월 15일(태양절)까지 평양에 휴대전화 서비스를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은 태국의 록슬리가 주도한 컨소시엄인 록스팩(Loxpac)과 손을 잡았다. 2002년 11월 11일 록스팩과 조선체신회사의 합작사인 NEAT&T가 휴대전화 서비스에 나선다. 군사용이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북한 최초의 상업용 휴대전화 서비스였다. 통신 방식은 GSM(Global System for Mobile Communications)이었다.

2002년 11월 평양국제통신센터빌딩 2층에 휴대전화 전문 판매점이 생겼고 모토로라 휴대전화 5000대가 북한으로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다. 공식 휴대전화 서비스를 개통한 후 2003년 초까지 가입자 수는 3000명 수준으로 머물렀지만, 2003년 말 가입자 수는 2만명 수준까지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 필자가 만난 북측 관계자는 당정군 고위 간부들에게 국비로 휴대전화를 지급한 후 수지타산이 맞지 않자, 일반인에게도 휴대전화를 공급하기 시작한 덕분이라고 전했다.

북한 최초의 상업용 휴대전화 서비스는 예상하지 못한 큰 사고로 전격 중단됐다. 2004년 4월 22일 평안북도 룡천군에서 열차 폭발로 200여명이 사망하고 1500여명이 부상하는 큰 사고가 발생했다.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이 중국 방문(2004년 19∼21일)을 마치고 특별열차 편으로 룡천역을 지나간 지 불과 9시간 만이었다. 화물열차가 산산조각 나면서 검은 구름이 일대를 뒤덮었고 분진은 북서쪽으로 16km 떨어진 신의주 일대까지 날아갈 정도였다.

해당 사고의 원인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김정일 암살 기도라는 소문이 돌았다. 북한 당국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사건 직후 북한 당국은 휴대전화 사용을 전면 금지하였다. 신화통신 등 중국의 주요 매체들도 북한 당국의 당시 우려를 확인해주고 있다. 사건이 발생한 지 6년 후인 2010년 중국 당 기관지 신화통신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2004년 4월 22일 평안북도 용천역에서 기차 폭발사고가 발생해 200명 가까운 사람이 죽고 1500명 이상이 부상했으며 8000여 채의 집이 부서졌으며 김정일 암살 기도였다는 소문이 퍼졌다. 북한 당국은 즉각 휴대전화 서비스를 중단한다.

북한은 4년의 공백 기간을 거쳐 2008년 12월 15일 이집트 통신업체 오라스콤텔레콤과 합작해 이동통신서비스를 재개한다. 2008년 말부터 현재까지 시기를 ‘제4기 – 2차 공식 서비스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북한이 휴대전화 서비스를 재개하는 데도 국가 기념일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바로 2012년 김일성 탄생 100주년이라는 초대형 기념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북한 통치 권력, 즉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은 김일성 탄생 100주년인 2012년까지 사회주의 강성대국을 건설하겠다고 대내적으로 선포해놓은 상황이었다.

오라스콤텔레콤은 북한 당국과의 협상을 통해 이 회사가 4년간 4억 달러를 투자하는 조건으로 북한에서 3세대 WCDMA 기술 기반의 이동통신 사업권을 획득하였다. 오라스콤텔레콤의 2008년 사업보고서에 의하면, 북한 당국과 오라스콤텔레콤은 2007년부터 협상에 나섰으며 오라스콤텔레콤은 2008년 1월 북한의 이동통신 사업권을 취득하였다. 오라스콤텔레콤과 북한의 조선체신성 산하 조선체신회사는 각각 지분 75%, 25%씩을 투자해 북한 현지 합작회사 체오(CHEO)사를 설립했다. 체오의 서비스 회사명은 ‘고려링크’인데, 고려링크는 북한에서 휴대전화 판매, 기지국 설치, 가입자 모집, 통신 서비스 제공 등을 맡았다.

오라스콤텔레콤의 사업권은 2008년부터 2012년까지 4년 동안 독점적으로 서비스할 권리를 포함해 25년간 북한 내 이동통신사업을 영위할 수 있는 라이선스였다.

북한 당국은 2008년 12월 15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3세대 이동통신봉사 선포식’을 열고, 이와 관련한 영상을 미국의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 공개하여, 3세대 첨단 통신 서비스를 통해 정보화에 앞장선다는 점을 대외적으로도 과시하였다. 다음은 북한 당국이 공식 배포한 것으로 추정되는 유튜브 동영상의 내용이다.

▲ 북한 당국이 공식 배포한 것으로 추정되는 유튜브 동영상의 내용

북한 휴대전화가 이중 네트워크로 발달한 이유

▲ 북한에서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주민들

북한 당국은 휴대전화에 대해 일관성이 있는 태도를 취하지 못하였다. 기본적으로 정보화를 강조하고 통신망을 현대화하는 정책을 집행하지만 주민 통제 약화에 대한 두려움과 정보의 외부 유출에 대한 우려로 휴대전화 보급을 실천 과정에서는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북한 당국이 휴대전화 서비스를 재개한 뒤에도 또다시 휴대전화에 대한 통제주의적 태도를 보였다. 북한의 휴대전화 가입자 수가 급속히 늘어가던 2011년 중동 지역에 민주화 바람이 거세게 불자, 북한 당국은 공식 보도 자료를 통해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의 폐해를 강조하는 사례들을 내보내며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조선중앙통신은 ‘미국의 골칫거리 스마트폰’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미국의 수감자들이 스마트폰을 이용해 마약과 무기를 감옥에 밀반입하고 있다”며 스마트폰의 폐해를 강조하기도 했다.

‘민심을 노린 허위선전에 대한 경종’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는 “중국에서 인터넷을 통해 민심을 흐리게 하고 사회적 불안정을 조장하는 행위에 타격을 가하는 것은 인민의 이익과 사회의 안정, 조화로운 발전을 위한 옳은 조치”라며 중국 정부의 인터넷 통제 정책을 옹호했다.

사실 북한의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는 휴대전화에만 국한되지 않고 유선전화, 프린터, TV, 라디오, 컴퓨터와 인터넷 등 새로운 미디어를 수용할 때마다 반복되어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북한이 제2차 공식 휴대전화 서비스를 나서기 직전인 2007년 말에도 북한의 보위부는 내부 정보 유출과 시장 정보 거래를 이유로 빛섬유전화(장거리 유선 전화)사용을 금지하였다. 이 조치에 따라 당국의 허가를 받지 못한 주민들은 시외 장거리 전화를 할 수 없었고 간부들도 급수에 따라 전화 사용 범위가 정해졌다. 당시 북한 당국은 “국가적으로 비밀 루설(누설)이 많아 장사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였고 한다. 지방 사람이 장거리 전화를 하려면 체신소(우체국)까지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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