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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휴대전화 이야기] 2002년 북한 이동통신사업권을 따기 위해 만들어진 남측 교섭단

2018.02.26 FacebookTwitterNaver

평창 동계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관계가 사뭇 달라지는 분위기다. 평양에서 남북 정상 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커졌고, 2021년 동계 아시아 게임을 남북 공동으로 개최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평창 칼바람 속에 남북 관계 훈풍이 불고 있다.

국내외 변수가 많기 때문에 남북 관계에 대한 섣부른 전망은 금물이다. 다만, 과거를 차분히 돌아보는 것은 여러 시나리오를 예상해 보는 데 도움이 된다. <영화 ‘강철비’처럼 남북한 통화 가능할까>에 이어 두 번째 북한 휴대전화 이야기는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직후 사건들을 준비했다. 당시 북한 이동통신 사업권을 따기 위해서 남측 교섭단이 만들어졌다.

달라진 김정일 위원장의 행보

2000년 6월 13일,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 겸 국방위원장은 평양 순안 공항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전격적으로 만난다. 남북 두 정상의 회담은 3일 내내 이어졌다. 이듬해 1월 15일, 김 위원장이 이번엔 중국 상하이(上海)를 찾았다. 김 위원장이 베이징이 아닌 중국의 경제 수도 역할을 하는 상하이에서 대부분의 일정을 보내자, 북한이 중국식 개혁개방에 나설 수 있다는 외신 분석이 나왔다.

실제로 김 위원장은 상하이의 발전상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그는 중국 회담 석상에서 “짧은 기간에 세상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게 변모된” 상하이 발전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평양으로 돌아온 김 위원장은 김일성 탄생 90주년인 2002년 4월 15일(태양절)까지 평양에 휴대전화(이동통신) 서비스를 하라고 지시했다.

북한 조선체신성은 김 위원장의 지시를 받고 이동통신 사업을 위한 투자 유치를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합작 회사 파트너를 찾기 위해 다수 외국 기업과도 접촉했다. 북한의 접촉 대상에는 남한의 통신 및 전자 기업도 포함돼 있었다. 2002년 북한 당국은 통일 시대에 대비한다는 근거로 CDMA(당시 남한 이동통신 방식 표준)에도 관심이 있다는 점을 자주 표명했다. 남북한 교류 분위기 덕분에 남측 정보통신 인사들도 여러 차례 방북했다.

1·2차 남북한 전신회담

2000년 SK텔레콤은 대북통신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재야 운동가 출신인 구해우씨(현 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를 북한 담당 상무로 특채한다. SK텔레콤과 북한 측은 여러 차례 협상을 했고 2001년 가을 조정남 SK텔레콤 대표이사와 주규창 북한 노동당 군수공업부 제1부부장이 통신사업 양해각서(MOU)를 교환했다. 당시 SK텔레콤이 계획한 북한 투자 규모는 10년 간 3000억 원 수준이었다.

막상 SK텔레콤이 대북 이동통신 서비스에 나선다는 점이 알려지니, 삼성, 현대 등 대기업에서 사업권을 주장하거나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현대 그룹 측은 1998년 정주영 회장의 방북을 계기로 대북 사업 전반에 걸쳐 포괄적인 제휴를 북한 측과 맺었다고 주장했다. 이 그룹은 이동통신 서비스 관련해서도 추상적인 언급이 있다고 주장하며 SK텔레콤이 맺은 MOU의 효력에 의문을 강하게 제기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남한 정부는 북한의 통신 사업권을 획득하기 위한 대북 교섭단을 구성했다. SK텔레콤⋅한국통신(KT)⋅삼성전자⋅LG전자⋅현대시스콤 등 5개 기업의 상무급이 대표단에 참가하고 단장은 변재일 당시 정보통신부 정보통신기획관리실장(현 국회의원)이 맡았다. 5개사는 방북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 북한 이동통신서비스 사업을 위한 컨소시엄 구성에 합의하는 계약서를 체결했다.

남북한 제1차 전신 회담은 2002년 6월 4일부터 8일까지 열렸다. 남북한 제1차 전신 회담에서 북한은 CDMA 이동통신기술의 채용을 희망했고 남한은 제3세대 CDMA 시스템 설비 제공, 연내 평양에 CDMA 이동통신 서비스 개시 등을 약속했다. 대북 교섭단도 북한 체신성과의 합동회의를 열고 ①평양, 남포 지역 휴대전화 서비스 제공 ②10만 원 이하로 휴대전화 공급 ③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한 별도의 전원공급장치 설치 ④통일부, 국가정보원 등 관계 기관 지원 등에 관해 합의, 서명했다. 다만, 최종 서명 당사자는 정부 측 인사가 아닌 한국통신의 당시 상무인 김동훈 씨였다.

사그라든 훈풍

합의 내용이 실제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미국 상무성의 수출제한규정(EAR, Export Administration Regulation)때문이었다. EAR은 미국 기술이 10% 이상 포함된 제품을 적성 국가에 수출하는 것을 금지한다. CDMA의 원천 특허 기술 소유자는 미국의 퀄컴(Qualcomm)이었고 북한은 미국의 적성국이었다.

퀄컴은 남한의 북한 통신 사업을 위해 모종의 역할을 하는 제스처를 적극적으로 취했다. 2002년 8월 30일 어윈 제이콥스 미국 퀄컴 회장과 두 아들인 폴 제이콥스 사장, 제프 제이콥스 사장 등이 전용기편으로 방한해 이상철 당시 정보통신부 장관을 면담했다. 이날 이 장관과 제이콥스 회장은 북한 내 이동통신 사업 협력 방안을 집중 논의했다.

퀄컴의 이러한 행보는 CDMA 시장 자체를 확장하겠다는 사업적인 이유 외에도 한국이 CDMA 기술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국가라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국 샌디에이고의 작은 벤처 기업에 불과했던 퀄컴은 한국 정부가 세계 최초로 CDMA 방식의 상용화에 나서면서 눈부시게 성장했다.

마침내 2002년 11월 11일 북한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상업용 이동통신 서비스를 시작한다. 서비스 사업자는 태국 록슬리 컨소시엄인 록스팩(Loxpac)과 조선체신회사의 합작사인 NEAT&T였다.

곧이어 남북 사이에 불던 훈풍도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1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남한 기업들이 북한 이동통신 사업권을 따기 위해 컨소시엄을 만든 사실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2002년 당시 사건들이 생경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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