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의 모바일] 휴대폰 메모장, 내 창작의 산실

2009. 10. 05


  박민영 (문화평론가)
나는 간혹 독자들에게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분야에 대해 글을 쓰세요?” 실제로 내가 이제까지 써온 책들을 보면 한자 학습서나 독서법에 관한 실용서에서 정치, 경제, 철학, 역사, 심리학 관련 책들까지 다방면에 걸쳐 있다. 그러니 어떤 독자들에게는 내가 만물박사쯤으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나는 그리 뛰어난 머리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 특히 기억력이 좋지 않다. 그래서 역사적 인물들의 이름이나 특정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아 글 쓰는 데 애를 먹을 때가 많다. 그래도 이런 문제는 사전이나 컴퓨터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문제는 아이디어이다. 좋은 생각이 방금 떠올랐었는데, 뒤돌아서면 바로 잊어버리는 것이다. 글 쓰는 사람에게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신경림 시인은 어느 인터뷰에서 “무엇을 잊어먹는 것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잊어먹은 것이므로 아깝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내가 경험한 바로는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적지 않으면 잊어먹고, 적으면 잊어먹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찾은 대안은 메모였다. 본격적으로 글쟁이 생활을 시작하면서 메모는 나의 일상이 되었다. 길을 가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누구와 대화를 하다가도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나는 쉴 새 없이 메모한다. 심지어 자려고 누웠다가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일어나 메모를 해놓아야 마음이 놓인다. 그렇지 않으면 곧 잊어버릴까 두려워 잠이 오지 않는다. 이런 메모 습관 때문에 불면증도 있다. 잠자리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를 때면 메모하느라 잠을 설치는 것이다.

글쟁이들이 메모에 집착하는 것은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작가들에게 메모의 힘은 크다. 예를 들어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은 메모로 이루어진 대작이고, 니체도 『도덕의 계보』가 메모 한 장에서 시작되었다고 술회했으며,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도 메모에 집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베스트셀러였던 정민의 『죽비소리』도 한문고전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을 메모했다가 모아서 낸 책으로 알고 있다. 내가 다방면으로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실은 메모 때문이다. 메모를 해야 잊어먹지 않고, 그것을 씨앗으로 삼아 ‘쓸 것’들을 마련할 수 있다. 나에게 메모는 글의 시작이자 끝이다.

메모의 생명은 생각날 때 바로 적는 데 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다. 책상 앞에 앉아있을 때는 컴퓨터 파일에 저장해놓거나 수첩에 적으면 된다. 그러나 중요한 아이디어는 오히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떠오를 때가 많다. 예를 들어 간단히 산책을 하려고 빈 몸으로 공원에 나가거나, 화장실에 있을 때가 그렇다. 그럴 때 어떤 중요한 생각이 떠오르고, 그것이 다시 가지를 쳐나가면 그것을 다 기억하기란 힘들어진다. 예전에는 이런 상황이 난감하기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휴대폰 메모장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휴대폰 부가기능 중에서 메모장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나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이 메모장 기능이 좋다. 나는 틈틈이 메모하고, 적힌 것들을 바라보며 다시 생각하고, 그러는 동안 떠오른 것들을 다시 저장해 놓는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그것을 컴퓨터 파일로 정리한다. 메모의 기술을 다룬 책들에서는 여러 색깔의 펜을 사용해서 메모하라는 둥, 카드에 메모하라는 둥, 포스트잇을 이용하라는 둥 얘기한다. 그러나 메모가 그렇게 불편한 과정을 요한다면 그것은 이미 메모가 아니다. 내 경험으로는 휴대폰 메모장만큼 편리한 것은 없다. 무슨 생각이 떠오르면, 어차피 갖고 다니는 휴대폰을  꺼내 바로 입력하면 된다. 얼마나 간편한가.

얼마 전 나는 신문에서 영화 〈해운대〉의 윤제균 감독 역시 휴대폰 메모장을 주로 이용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원래 〈색즉시공〉등 코믹영화를 주로 만들어왔던 그는 듣거나 본 웃기는 이야기를 다 휴대폰 메모장에 저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메모장은 10만원권 수표를 ‘신권’으로 바꿔오라 했더니 ‘식권’으로 바꿔오는 식의 사건들로 꽉차있다. 관객들은 그의 영화가 상상력의 산물인 줄 알기 쉽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실제 사건들에 대한 메모의 산물이다.

작가들은 흔히 창작의 산실로 서재나 자신이 자주 가는 산책로를 보여준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휴대폰 메모장’을 보태고 싶다.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자, 나쁜 기억력 때문에 고민하는 자, 좀 더 자기 일에 완벽을 기하려는 자는 휴대폰 메모장을 열라. 그리고 틈틈이 메모하라. 문이 열릴 것이다.


문화평론가 박민영 님은…
저서로  [공자 속의 붓다, 붓다 속의 공자](2006년 문화관광부 선정 우수교양도서),  [즐거움의 가치사전](2007년 문화관광부 선정 우수교양도서, KBS ‘TV 책을 말하다’ 선정 도서),  [이즘](2008년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우수교양도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