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의 모바일] 로마의 휴일은 어디에…

2009. 10. 16

 


 최광예 (KBS ‘세상은 넓다’ 방송 작가)

이탈리아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미지가 있다. 고3 수능시험 직후에 봤던 한 편의 영화 <로마의 휴일>. 내가 기억하는 가장 강렬한 이탈리아의 모습이다. 공주의 신분으로 딱딱한 왕실생활을 벗어나 로마에서 꿈같은 자유를 만끽하는 오드리 헵번의 모습은 여고생이던 내게 로마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갖게 했다. 물론 현실에서 영화 속 로마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순진한 생각이다. 그래도 2500년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만큼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로마의 멋진 모습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로마의 좁은 골목


유럽여행의 일번지로 손꼽히는 로마한국인 민박집이 많고, 그 경쟁도 꽤나 치열하다. 유럽여행 중에 아침저녁 꼬박 한식을 먹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 바로 로마의 민박집일 만큼 각별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가 무허가로 운영되는 곳이긴 해도 여행객에게는 합법이냐 불법이냐를 따지는 것보다 합리적인 가격과 깨끗한 시설이 더 중요하다. 나 역시 인터넷을 통해 좋은 이용후기가 달린 민박집을 예약했다. 불법이라 그런지 몰라도 민박집의 위치는 정확히 표시돼 있지 않고, 주인아저씨가 테르미니역으로 직접 데리러 나오는 형식으로 운영된다.

민박집 주인아저씨를 만나기로 한 24번 플랫폼까지의 거리는 상당히 멀었다. 로마 테르미니역은 유럽의 기차역 중에서도 손꼽을 만한 규모를 자랑한다. 걷다보면 수많은 쇼핑몰과 상점들을 구경할 수 있다. 이곳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단연 휴대폰 대리점 쇼윈도에 진열돼 있는 우리나라 휴대폰이다. 이제 놀랄 일도 아니지만, 여행을 하면서 우리 휴대폰을 사용하는 현지인들을 만나면 은근히 뿌듯해진다. 로마의 휴대폰 대리점에도 우리 휴대폰이 메인 진열대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발걸음이 더욱 가벼워진다.

그런데 10분여를 걸어 약속장소에 도착했지만 어디에도 아저씨는 보이질 않았다. 두리번거리다가 전화를 걸어보니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며 바로 전화를 끊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나타난 한 동양 남자가 내 앞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면서 한마디 흘렸다. 

“따라와요~”
“네?  저…….  OO민박집 아저씨?”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어찌됐건 한국말을 하는 것으로 확인된 아저씨의 뒤를 졸졸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대로변을 지나고 골목 안쪽으로 들어서고 나니 아저씨는 건물 주차장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따라 들어갔더니 차 트렁크 하나를 열고, 신속하게 나의 캐리어를 집어넣는다.

주차장을 돌아 나오면서 아저씨에게 이 첩보작전의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로마에서 요즘 대대적인 단속이 있다 보니 역 주변에 여행객을 주시하는 눈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그래서 숙소까지 가는 동안 이렇게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나의 여행객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재빨리 캐리어를 차에 숨기고 나서야 민박집 아저씨는  숙소까지 가는 길을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했다. 건널목 하나를 건너고 공원이 나오면 우측으로 돌아 세 번째 골목으로 간다. 거기서 키오스크가 보이면 그 앞쪽 길을 따라…….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아저씨의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익숙하지 않은 로마의 길목을 빠르게 걸었다. 여행을 하다보면 매일 새로운 길을 만나고 파악하야 하는 것이 일상이지만, 로마의 골목길은 어디를 봐도 거기서 거기 같다는 생각이 들만큼 칙칙하고 어두운 편이다. 이렇게 하다간 혼자 길을 찾아가긴 어렵겠다 싶어 휴대폰 메모장에 아저씨의 설명을 들은 대로 입력하기 시작했다. 방향감각과 지형지물은 전혀 파악되지 않았지만, 일단 숙소까지 길을 입력해 두고 나니 그나마 안심이 됐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숙소에 도착하고 나니 야간열차를 타고 오면서 쌓인 피로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낮잠이나 푹 자둘까 싶기도 했지만, 여행일정 하루를 낮잠으로 허비하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주인아저씨가 끓여주신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 정신을 깨우고, 바로 로마에서의 일정을 시작했다.

웅장한 모습의 콜로세움


 

울퉁불퉁한 포석이 그대로 남아 있는 로마의 골목길은 그다지 화려하지도 깨끗하지도 않지만 터덜터덜 걷는 것만으로도 나름 운치 있게 느껴진다. 길을 걷는 동안 수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크고 작은 성당들과 고대 검투사들이 겨루던 콜로세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캄피돌리오 언덕을 지나 포로로마노까지 줄줄이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고대 로마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 만큼 로마 역사의 힘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로마를 여행하다 보면 절실한 한마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생각난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유서 깊은 유적지와 이탈리아 최고의 예술작품들을 마주하게 되는데, 이들을 감상하는 데에는 역사시간에 배운 내용이나 가이드북에 있는 짤막한 설명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낄 때가 많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캄피돌리오 언덕

 

영원의 도시, 유럽 도시의 요람이라는 수식어답게 로마는 유럽여행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인 바티칸 시국도 로마여행의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때문에 바티칸 시국에서는 대부분 가이드 투어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로마 전역에서 모두 가이드 투어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차선책으로 휴대전화에 로마의 알짜 정보를 가득 담아올 수 있다면 어떨까? 자유롭게 인터넷 검색을 이용할 수 있는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게 어렵다면 모바일 북을 미리 다운받아 가져오는 것도 방법이 되겠다.


스페인 광장의 베르니니의 분수


드디어 ‘로마의 휴일’코스! 불과 몇 시간 전에 낮잠을 자고 싶어했던 나는 어느새 오드리 헵번을 따라 ‘진실의 입’에 손을 넣으며 관광객 모드로 돌입했다. ‘진실의 입’에 손을 넣고 난 다음에는 그 유명한 트레비 분수로 향한다. 분수 앞에서 동전을 던지면서 소원을 말했다면 마지막 목적지는 스페인 광장이다. 이곳에서 로마의 명물 젤라또를 먹으면서 오드리 헵번 따라잡기를 대략 마무리하면 되는 것이다. 

 


스페인 광장에 도착하니 오드리 헵번 따라잡기를 하러 온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 광장과 계단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헵번이 없어도 스페인 광장의 풍경은 장관이었다. 나도 관광객들이 빼곡하게 자리한 계단 한 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아 사람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걸어 다니느라 다리는 아팠지만 두 눈은 더 말똥해졌다. 인종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광장의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에 확 들어오는 이들이 있었다. 수없이 많은 관광객들 사이에서 열심히 셔터를 누르는 DSLR족!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한국 사람의 포스였다. 마침 그 두 사람도 나를 발견하고 한국 사람임을 알았는지 다가오더니 즉석에서 사진 한 장을 부탁했다. 두 사람의 사진을 찍어주고 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두 사람도 로마여행 중에 같은 숙소에서 만났다고 한다. 

로마에서 즐기는 아이스크림


계단에 앉아 오랜만에 한국 사람들과 엄청난 양의 수다를 떨고, 숙소로 돌아가는 지하철을 타러 일어섰다. 그런데 그 두 사람과 자꾸 같은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이들도 나와 같은 숙소에 머물고 있었다. 그 넓은 유럽 땅 하고도 로마의 스페인 광장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이 하필이면 같은 숙소에 머물고 있다니……. 영화 같은 로맨스는 아니었지만, 이후로도 며칠간 로마에서 나의 ‘찍사’를 담당해 주던 두 사람 덕분에 혼자 하는 여행 중에 귀하다는 멋진 독사진을 많이 남길 수 있었다.

 


KBS 방송작가 최광예님은…
KBS <생로병사의 비밀>, <문화지대>, <세상은 넓다> 등 주로 문화, 여행, 교양 프로그램의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톡톡 튀고 감성적인 문체가 이색적인 그녀의 스토리텔링 참여도서는 <Shout! 자신감>, <앨리스의 비밀통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