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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新JOB] 기술로 우리 동네를 디자인한다_리빙랩 코디네이터

2017.12.26 FacebookTwitterNaver

드론은 마니아들의 멋진 취미이자 소매업체의 차세대 배송 도구지만, 그런 역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기업 엔젤스윙의 드론은 개포동 구룡마을 쪽방촌의 상세 지도를 그려, 소외된 지역 주민들의 소방, 치안, 복지를 돕습니다. 만약 이 지도가 일찍 만들어졌더라면 올 초 29가구가 전소된 구룡마을 화재 피해를 조금은 줄일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대전의 갑천은 비만 오면 하천이 범람해 1년에 한두 명은 돌다리를 건너다 빠지는 사고를 겪습니다. 하지만 이제 주민들은 길을 나서기 전 스마트폰 앱으로 하천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전의 ‘건너유’ 프로젝트 덕분입니다. 이 프로젝트에서 드론은 카메라와 태양열 기술과 더불어 하천의 상태를 감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는 주로 기술을 통한 신시장 창출이나 기존 산업의 혁신, 일자리와 직업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술의 역할은 비단 경제적 영역에 그치지 않습니다. 기술을 어떻게 활용하냐에 따라 사회의 큰 변화를 이뤄낼 수 있습니다.

위 사례는 드론을 중심으로 본 것이지만 인공지능과 로봇, 클라우드, 빅데이터, IoT, 블록체인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이라고 일컬어지는 기술들을 잘 활용하면 얼마든지 많은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리빙랩(Living Lab)이라는, 기술을 이용한 사회문제 해결방식이 주목받는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리빙랩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연구실입니다. 출연 연구기관의 실험실이나 대학의 연구실이 아닌 시민들이 존재하는 곳이 바로 연구실이고 연구 대상이라는 의미입니다. 서구에서 2000년대 초반에 등장한 이 개념은 요즘 우리나라에서 아주 핫한 용어가 됐습니다.

지역 재생과 사회 혁신, 시민 참여, 공동체 복원이라는 키워드가 주요 국정 과제로 제시되면서 국민 생활 연구가 본격화됐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매년 20조 원의 막대한 국가 예산을 투입해 연구개발을 진행해 왔지만 정작 사회의 현안,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기술이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는 반성에서 나왔습니다. 대전, 성남, 제주, 포항 등 각 지자체도 나섰습니다. 예산을 별도로 투입해 리빙랩 프로젝트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소셜 디자이너

리빙랩 프로젝트를 디자인하고 운영, 조율하는 사람을 리빙랩 코디네이터라고 부릅니다. 리빙랩은 현실적으로는 지역 단위와 마을 단위로 이뤄지기 때문에 지역 활동가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물론 직업으로 정리된 개념은 아닙니다. 하지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지역 기반의 혁신 프로젝트들은 대부분 리빙랩 형태를 취하고 있어, 코디네이터들이 늘고 있습니다. 정규직도 있지만, 직업이 있는 상태에서 전문가로 참여하거나, 파트타임으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상당수입니다. 혹은 ICT지원기관(테크노파크, 창조경제혁신센터 등)이나 대학의 지역 사회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넓은 범위의 리빙랩 코디네이터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리빙랩 코디네이터는 고정된 직업보다는 역할에 초점을 맞춘 직무에 가깝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리빙랩의 형태가 꾸려진 것은 2004년 탄생한 대전시민참여연구센터(이하 참터)입니다. 참터에서 14년째 운영위원장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김민수 ETRI 연구원은 자연스럽게 리빙랩 활동가 1세대가 됐습니다.

물론 그때는 리빙랩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유럽에서 퍼지고 있던 ‘과학상점(Science Shop)’ 개념에 주목했죠. 당시만 해도 지역 문제는 그저 도로를 포장하고, 복지 예산을 쓰고, 주민 한마당 같은 것만 열면 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김민수 연구원은 과학기술로써 사회와 지역 문제를 푸는 것이 가능할까를 고민했고, 준비 기간 2년을 거쳐 과학상점 1호 참터를 출범했습니다.

과학상점은 1970년대 네덜란드에서 시작되어 이후 세계적으로 확산된 모델입니다. 지역의 과학자, 기술자들이 주민들과 공동으로 마을 문제를 찾고 해결해나가는 형태죠. 노트가 필요하면 문구점에 가고, 책이 필요하면 서점을 가잖아요. 그런데 과학이나 기술이 필요하면 어디로 가야 하죠? 그래서 과학상점을 생각했습니다. 당시 대전에선 사회 혁신가 네트워크를 꾸려보자는 움직임이 있었어요. 물론 대부분은 시민사회 영역, 마을 활동가 위주였지만 대전이 대덕 연구단지 특구를 가진 여건으로 인해 기술에 대한 접근이 상대적으로 수월했습니다.”

지역 문제를 시민 참여와 기술로 해결

참터가 진행했던 지역 문제 프로젝트는 다양합니다. 충남 연기군 전의면의 안티몬 폐기물 매립 문제, 대전 1-2 공단지역 환경오염에 관해 조사, 치아 충전재의 안전성과 경제성, 대전 유성구 지역 주민이 참여하는 한 평 공원 만들기, 아토피 피부염에 대한 기초조사 등이 이뤄졌습니다.

어떤 것은 의견만 전달했고, 어떤 것은 실행에 참여했습니다. 또 어떤 것은 무산되고 어떤 것은 겨우 실행에 옮겨졌죠. 기술을 위한 기술 개발보다,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기술은 훨씬 더 복잡하고 변수가 많기 때문에 정말 쉽지 않습니다. 결과 자체보다는 끊임없이 지역 주민들과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더 가치를 두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2015년부터는 대전시가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조금 더 뚜렷한 목적의 리빙랩 사업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지역적 특성이 다른 대전의 대덕구 대화동, 중구 중촌동, 금산군 3개 지역을 대상으로 총 72건의 사회문제를 도출해 영역별 추진과제를 선정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특히 주차와 쓰레기 문제로 어려움을 겪은 오장동 농수산물 시장의 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센서 기반 시장관리 리빙랩’은 성과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참터의 활동은 현안 해결뿐만 아니라 리빙랩의 운영에 대한 체계를 갖추는 것도 포함됩니다. 시민참여 모델을 조사하고 사회문제 정의서 포맷을 마련하는 등 다른 지역의 리빙랩 기관이나 프로젝트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기초를 다져놓았습니다.

참터는 아시아 지역에서도 처음으로 만들어진 과학상점이라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도 큽니다. 이후 성남, 포항 등 지역별, 단위별로 다양한 리빙랩 조직들이 생겨났습니다. 국내 리빙랩 조직들은 한국리빙랩네트워크라는 전국 단위 포럼을 만들고, 상호 경험과 노하우를 나누고 있습니다. 김 운영위원장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리빙랩 프로젝트 확산 추세, 돈보다는 의미 있는 일

직업 이야기로 돌아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리빙랩 활동가는 전혀 맞지 않는 옷입니다. 대전에도 100여 명의 코디네이터들이 있지만, 대부분 다른 직업을 갖고 있거나 파트타임으로 참여합니다. 물론 조직을 꾸려가는 몇 명은 정규직으로 업무를 진행하고 있지만 큰돈을 벌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회적인 의미와 공동체 회복이라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의 보상은 충분합니다. 내 지역, 우리 사회를 직접 디자인하고 바꾸고 업그레이드시키는 희열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요즘은 리빙랩 프로젝트들이 늘어나면서 인건비 구조도 좋아지고 있습니다.

리빙랩 코디네이터는 지역 문제에 관심이 많고, 이를 기술과 시민참여로 풀어낼 의지만 있다면 누구든 할 수 있습니다. 대규모 직업군이 될 가능성은 없지만 언제나 있는 역할이고, 또 평생을 두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올인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앞으로의 과제는 사회적 기업 형태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고 자생력을 갖춰 리빙랩 코디네이터들이 좀 더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14년 동안 한 조직을 운영했다는 것은 그사이 있었던 온갖 갈등과 문제와 어려움을 견뎌냈다는 뜻입니다. 비영리 조직의 일을 하면서 월급 한 푼 가져가지 않는 고생스러운 자리를 그 긴 시간 지켜온 비결은 뭘까요? 함께 한 동료들, 그리고 과학자로서의 소임일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금씩 변해가고 좋아지는 지역 공동체의 모습일 것입니다.

기술로써 시민의 삶을 복원하는 리빙랩 코디네이터. 4차 산업혁명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직업이며, 기술이 인간의 삶에 가치있게 적용되도록 돕는 보람찬 일입니다. 특히 마음과 의지만 있다면 평생 동안 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김민수 연구원은 강조합니다. 과학 기술을 활용해 우리 사회를 디자인해나가는 리빙랩 코디네이터, 여러분도 이 직업에 도전해 보람과 희열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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